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 TO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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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가 1946년 창립된 이래 수많은 전설적인 선수들이 코트를 누볐습니다. 이들 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10명을 선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각 시대마다 규칙이 달랐고, 플레이 스타일도 변화했으며, 경쟁 수준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농구 전문가, 분석가, 그리고 팬들이 대체로 합의하는 TOP 10 명단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단순히 뛰어난 선수를 넘어서 농구 역사 자체를 바꾼 아이콘들입니다.

1위: 마이클 조던 (Michael Jordan)

마이클 제프리 조던은 단순히 NBA 최고의 선수가 아니라, 스포츠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1984년 시카고 불스에 3순위로 드래프트된 조던은 이후 15시즌 동안(워싱턴 위저즈 시절 포함) NBA를 완전히 지배했습니다.

조던의 통계는 그 자체로 전설입니다. 커리어 평균 30.1득점은 NBA 역사상 최고 기록이며, 이는 정규시즌에만 해당됩니다. 플레이오프에서 그의 평균은 33.4득점으로 더욱 상승했는데, 이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더욱 빛을 발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10번의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이 기록은 2위인 윌트 체임벌린의 7회를 크게 앞섭니다.

하지만 조던의 위대함은 단순히 득점 능력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는 9번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으며, 1988년에는 수비수 최우수 선수상(DPOY)을 수상했습니다. 현대 NBA에서 득점왕과 DPOY를 동시에 차지한 선수는 조던이 유일합니다. 그의 평균 2.3 스틸은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게임을 지배했음을 보여줍니다.

조던의 가장 인상적인 업적은 6번의 NBA 챔피언십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파이널에 진출한 6번 모두 우승했다는 점입니다. 6-0이라는 완벽한 파이널 기록은 그가 최고의 무대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6번의 파이널 모두에서 파이널 MVP를 수상했으며, 이 또한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조던의 클러치 능력은 전설적입니다. 1998년 유타 재즈와의 파이널 6차전에서 보여준 "The Last Shot"은 농구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순간 중 하나입니다. 경기 종료 5.2초를 남기고 성공시킨 결승 슛은 불스의 6번째 우승을 확정지었고, 조던 시대의 완벽한 마침표가 되었습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3연패를 달성한 조던은 1993년 10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은퇴를 선언하고 야구로 전향했습니다. 그의 부재 동안 불스는 경쟁력을 잃었고, NBA 전체의 인기도 하락했습니다. 1995년 3월 "I'm back"이라는 짧은 팩스 한 장으로 복귀를 알린 조던은, 이듬해인 1996년부터 다시 3연패를 달성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조를 완성했습니다.

1995-96시즌 불스는 72승 10패라는 당시 NBA 역사상 최고 승률을 기록했습니다(이 기록은 2016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73승 9패에 의해 깨졌지만, 워리어스는 그 해 우승에 실패했습니다). 조던은 그 시즌 정규시즌 MVP, 올스타 MVP, 파이널 MVP를 모두 차지하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습니다.

조던의 영향력은 코트 밖에서도 막대했습니다. 나이키와의 파트너십으로 탄생한 에어 조던 브랜드는 스포츠 마케팅의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첫 에어 조던 신발이 출시된 1985년 이후, 이 브랜드는 연간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거대 사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조던은 NBA를 미국 내 스포츠를 넘어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필 잭슨 감독의 트라이앵글 오펜스 시스템 내에서 조던은 완벽하게 기능했습니다. 스코티 피펜과의 환상적인 조합은 역사상 최고의 듀오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조던은 개인적으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더 나은 선수로 만드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의 강렬한 승부욕과 완벽주의는 때로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불스를 왕조로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2003년 40세의 나이로 완전히 은퇴한 조던은 2009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그의 헌액 연설은 그의 경쟁심과 동기부여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고, 그가 왜 역사상 최고인지를 상기시켰습니다. 오늘날에도 "GOAT(Greatest Of All Time)" 논쟁이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조던은 여전히 확고한 1위입니다.

2위: 르브론 제임스 (LeBron James)

르브론 레이먼 제임스는 2003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1순위로 드래프트된 이후 20년 이상 NBA 최정상급 선수로 군림하고 있는 현역 레전드입니다. "King James"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는 농구 역사상 가장 완전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르브론의 가장 인상적인 측면은 그의 지속성입니다. 2025년 현재 4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올스타급 선수로 활약하고 있으며, 이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그는 NBA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로, 2023년 2월 카림 압둘 자바의 38,387점 기록을 경신하며 40,000점을 돌파했습니다. 이 기록은 앞으로 수십 년간 깨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르브론의 통계는 그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줍니다. 커리어 평균 27.2득점, 7.5리바운드, 7.3어시스트는 그가 모든 면에서 엘리트급임을 증명합니다. 특히 어시스트 수치는 그의 키(6피트 9인치)를 가진 선수로서는 이례적으로 높습니다. 그는 포워드 체격이지만 포인트 가드처럼 플레이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센터 역할도 소화할 수 있습니다.

르브론은 4번의 NBA 챔피언십을 차지했는데, 주목할 점은 세 개의 다른 팀(마이애미 히트,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LA 레이커스)에서 우승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적응력과 리더십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각 팀에서 그는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약체였던 팀들을 우승 후보로 만들었습니다.

2016년 클리블랜드에서의 우승은 르브론의 커리어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클리블랜드는 파이널에서 73승을 기록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게 1-3으로 뒤졌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1-3 열세를 극복하고 우승했습니다. 르브론은 마지막 3경기에서 평균 36.3득점, 11.7리바운드, 9.7어시스트라는 믿기 어려운 성적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7차전에서 보여준 "The Block"(안드레 이구오달라의 레이업을 막아낸 블로킹)은 NBA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수비 플레이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르브론은 4번의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으며(2009, 2010, 2012, 2013), 4번의 파이널 MVP도 차지했습니다. 그는 19번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3번 올NBA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탁월함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만들었습니다.

르브론의 농구 IQ는 전설적입니다. 그는 코트 위의 코치로 불리며, 경기를 읽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의 패싱 능력은 포워드로서는 유례없는 수준이며, 매직 존슨과 비교되곤 합니다. 동료들을 더 나은 선수로 만드는 능력은 그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입니다.

르브론은 연속 8년(2011-2018) 동안 NBA 파이널에 진출했는데, 이는 빌 러셀 이후 최장 기록입니다. 동부 컨퍼런스를 지배했던 이 기간 동안, 그는 마이애미에서 2연패를 달성한 후 클리블랜드로 돌아가 우승을 선사했고, 이후 LA로 이적해서도 2020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조던과 비교하면 르브론의 파이널 기록은 4-6으로 비판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르브론 지지자들은 그가 약한 팀을 파이널까지 이끌었다는 점, 그리고 20년 이상 최정상을 유지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2007년과 2018년 클리블랜드를 파이널까지 이끈 것은 거의 혼자 힘으로 이룬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르브론은 코트 밖에서도 영향력이 큽니다. 그는 사회 정의에 목소리를 내는 운동선수로 알려져 있으며, 고향 애크론에 "I Promise School"을 설립해 소외된 아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의 비즈니스 감각도 뛰어나 스프링힐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미디어 산업에도 진출했습니다.

2023-24시즌, 르브론은 아들 브로니 제임스와 함께 레이커스 유니폼을 입으며 NBA 역사상 처음으로 부자가 같은 팀에서 뛰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는 그의 경이로운 장수력을 상징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언제 은퇴할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은퇴 후에는 틀림없이 역대 TOP 2 선수로 기억될 것입니다.

3위: 카림 압둘 자바 (Kareem Abdul-Jabbar)

본명 루 알신더로 태어난 카림 압둘 자바는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센터이자, 가장 지속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낸 선수입니다. 1969년 밀워키 벅스에 1순위로 드래프트된 그는 20시즌 동안 활약하며 2023년까지 NBA 통산 최다 득점 기록(38,387점)을 보유했습니다.

자바의 트레이드마크는 "스카이훅"이라 불리는 훅 슛입니다. 이 슛은 7피트 2인치(218cm)의 신장과 긴 팔을 활용한 것으로, 역사상 가장 막기 어려운 슛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이 무기 하나만으로 수십 년간 리그를 지배했습니다. 스카이훅의 아름다움은 그 단순함에 있었습니다 - 기술적으로 완벽했고, 수비수가 알고 있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자바는 6번의 NBA 챔피언십을 차지했는데, 밀워키에서 1회(1971), LA 레이커스에서 5회(1980, 1982, 1985, 1987, 1988)를 우승했습니다. 특히 1980년대 레이커스의 "쇼타임" 시대에서 그는 매직 존슨과 함께 팀의 핵심이었습니다. 젊고 역동적인 매직과 노련하고 안정적인 자바의 조합은 완벽했습니다.

자바는 기록적인 6번의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습니다(1971, 1972, 1974, 1976, 1977, 1980). 이는 역대 최다 기록으로, 2위인 마이클 조던과 빌 러셀의 5회를 앞섭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리그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자바의 수비 능력도 탁월했습니다. 그는 NBA에서 블로킹 통계가 공식 기록되기 전에 전성기를 보냈지만, 그의 수비력은 전설적이었습니다. 15번 올디펜시브 팀에 선정되었으며,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팀은 페인트존 공격을 주저했습니다.

UCLA 시절 자바(당시 이름은 루 알신더)는 이미 전설이었습니다. 존 우든 감독 아래에서 그는 3번 연속 NCAA 챔피언십을 차지했으며, 3번 모두 토너먼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그의 지배력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NCAA는 덩크를 금지하는 규칙을 만들기도 했습니다(일명 "알신더 룰").

프로 무대에서 자바는 1975년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카림 압둘 자바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는 당시 미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용기와 소신은 그를 단순한 운동선수 이상의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자바는 42세까지 현역으로 뛰며 장수의 표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시즌인 1988-89시즌에도 그는 여전히 효과적인 선수였으며, 플레이오프에 기여했습니다. 20년 커리어 동안 1,560경기에 출전했는데, 이는 그의 내구성과 프로페셔널리즘을 증명합니다.

은퇴 후 자바는 작가이자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인종 평등과 사회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습니다.

카림 압둘 자바는 단순히 위대한 선수가 아니라, 지성과 품격을 겸비한 진정한 챔피언이었습니다. 그의 스카이훅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영원히 NBA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4위: 매직 존슨 (Magic Johnson)

어빈 "매직" 존슨 주니어는 농구 역사상 가장 카리스마 넘치고 혁신적인 선수 중 한 명입니다. 1979년 LA 레이커스에 1순위로 드래프트된 그는 포인트 가드 포지션을 완전히 재정의했으며, 1980년대 NBA의 부흥을 이끈 주역이었습니다.

매직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그의 체격이었습니다. 6피트 9인치(206cm)의 키로 포인트 가드를 소화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장을 활용해 코트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고, 상대 가드들 위로 패스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등장으로 "포지션"이라는 개념이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매직은 13시즌 커리어 동안 5번의 NBA 챔피언십을 차지했습니다(1980, 1982, 1985, 1987, 1988). 레이커스의 "쇼타임" 시대는 빠른 속공, 화려한 패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로 가득했으며, 매직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의 노룩 패스와 비하인드 백 패스는 관중들을 열광시켰고, LA를 NBA의 엔터테인먼트 수도로 만들었습니다.

매직은 3번의 정규시즌 MVP(1987, 1989, 1990)와 3번의 파이널 MVP(1980, 1982, 1987)를 수상했습니다. 특히 1980년 파이널 6차전은 전설적입니다. 부상당한 카림 압둘 자바를 대신해 센터로 나선 매직은 42득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우승을 확정지었습니다. 당시 그는 신인이었고, 이는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 퍼포먼스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매직의 패싱 능력은 역대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커리어 평균 11.2어시스트는 역대 최상위권이며, 그의 비전과 창의성은 비교할 대상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을 더 나은 선수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고, 어떤 선수와도 플레이할 수 있었습니다. 제임스 워디, 바이런 스콧, A.C. 그린 등 많은 선수들이 매직 덕분에 커리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매직과 래리 버드의 라이벌전은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 관계입니다. 이 둘의 대결은 대학 시절(1979 NCAA 파이널)부터 시작되어 프로 무대에서 계속되었습니다. 레이커스와 셀틱스는 1980년대에 세 번 파이널에서 맞붙었고, 이 라이벌전은 NBA의 인기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흑인과 백인, 서부와 동부, 쇼타임과 블루칼라 - 모든 대비가 완벽했습니다.

1991년 11월, 매직은 HIV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습니다. 당시 HIV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고, 그의 커리어는 갑작스럽게 끝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매직은 이 상황도 긍정적으로 바꿨습니다. 그는 HIV/AIDS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앞장섰고, 많은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92년 매직은 드림팀의 일원으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해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는 1996년 짧게 복귀하기도 했지만, 32경기 후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 매직은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매직 존슨 엔터프라이즈를 통해 영화관, 스타벅스, 피트니스 센터 등을 운영하며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LA 레이커스의 부사장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LA 다저스의 공동 구단주이기도 합니다.

매직 존슨은 단순히 훌륭한 농구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더 재미있고, 더 흥미진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미소와 열정은 전염성이 있었고, 농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습니다. "매직"이라는 별명은 그의 플레이를 완벽하게 설명합니다 - 그것은 마법이었습니다.

5위: 빌 러셀 (Bill Russell)

윌리엄 펠튼 "빌" 러셀은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자입니다. 13시즌의 커리어 동안 11번의 NBA 챔피언십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거의 믿기 어려운 기록입니다. 이 중 8번은 연속 우승이었는데(1959-1966), 이는 북미 프로 스포츠 역사상 가장 긴 연속 우승 기록입니다.

러셀은 1956년 보스턴 셀틱스에 드래프트되었습니다(세인트루이스 호크스가 2순위로 지명했지만 트레이드됨). 그의 도착과 함께 셀틱스는 즉시 왕조가 되었습니다. 신인 시즌부터 우승을 차지한 러셀은 이후 거의 매년 우승 반지를 받았습니다.

러셀의 위대함은 수비와 리바운드에 있었습니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수비 센터를 창조했습니다. 블로킹 통계가 공식 기록되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전문가들은 그가 경기당 평균 8-10개의 블로킹을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의 수비는 단순히 슛을 막는 것이 아니라, 상대팀의 공격 전체를 무너뜨렸습니다.

리바운드에서 러셀은 역대 최고 중 한 명이었습니다. 커리어 평균 22.5리바운드는 윌트 체임벌린에 이어 역대 2위입니다. 그는 수비 리바운드를 잡으면 즉시 속공을 시작했고, 이는 셀틱스의 빠른 템포 농구의 핵심이었습니다. 러셀 이전에는 센터가 수비만 하고 공격 전환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 패러다임을 바꿨습니다.

러셀은 5번의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습니다(1958, 1961, 1962, 1963, 1965). 이는 카림 압둘 자바의 6회에 이어 역대 2위입니다. 득점에서는 윌트 체임벌린에 밀렸지만, 승리에서는 그 누구도 러셀을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러셀과 체임벌린의 라이벌전은 1960년대 NBA를 정의했습니다. 체임벌린은 더 큰 체격과 압도적인 득점력을 가졌지만, 러셀은 우승에서 앞섰습니다. 두 센터가 맞붙은 경기는 항상 화제였고, 이는 "개인 통계 vs 팀 성공"이라는 영원한 논쟁을 만들어냈습니다.

1966-67시즌부터 러셀은 선수 겸 감독이 되었습니다. 이는 NBA 역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감독이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이 역할로 2번 더 우승했으며(1968, 1969), 1969년 우승은 그의 마지막 우승이자 은퇴 시즌이었습니다. 7차전에서 LA 레이커스를 꺾고 우승한 것은 완벽한 마무리였습니다.

러셀은 단순한 운동선수가 아니라 민권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미국의 인종 차별이 극심했던 시기에, 그는 평등을 위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1963년 워싱턴 대행진에 참여했으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직접 들었습니다. 보스턴조차 인종 차별이 심했고, 러셀은 여러 차례 차별을 경험했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러셀의 리더십은 전설적이었습니다.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이끌었으며, 팀을 위해 개인 통계를 희생했습니다. 커리어 평균 15.1득점은 다른 슈퍼스타들에 비해 낮지만, 그것은 그의 역할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11개의 우승 반지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2009년 NBA는 파이널 MVP 트로피를 "빌 러셀 NBA 파이널 MVP 어워드"로 개명했습니다. 2022년 NBA는 러셀의 등번호 6번을 전 리그적으로 영구 결번시켰는데, 이는 MLB의 재키 로빈슨(42번) 이후 북미 프로 스포츠에서 두 번째 사례입니다. 이는 그의 업적과 영향력을 인정한 것입니다.

빌 러셀은 2022년 7월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농구계 전체를 슬픔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단순히 위대한 선수가 아니라,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진정한 챔피언이었습니다. 11개의 반지는 그의 농구 업적을 보여주지만, 그의 진정한 유산은 그가 열어준 길과 그가 보여준 용기에 있습니다.

6위: 윌트 체임벌린 (Wilt Chamberlain)

윌튼 노먼 "윌트" 체임벌린은 NBA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개인 성적을 기록한 선수입니다. "The Big Dipper"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7피트 1인치(216cm)의 거구였지만, 놀라운 운동 능력과 힘을 겸비했습니다.

체임벌린의 기록들은 거의 비현실적입니다. 1962년 3월 2일, 그는 뉴욕 닉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100득점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NBA 역사상 가장 깨지지 않을 기록 중 하나로, 2위 기록인 코비 브라이언트의 81득점보다도 19점이나 높습니다. 그 경기에서 체임벌린은 63개의 필드골 시도 중 36개를 성공시켰고, 자유투는 32개 중 28개를 넣었습니다.

1961-62시즌 체임벌린은 시즌 평균 50.4득점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수치입니다. 그 시즌 그는 80경기 중 79경기에 출전했으며, 경기당 평균 48.5분을 뛰었습니다(경기는 48분이지만 연장전 때문에 가능). 그는 문자 그대로 쉬지 않고 뛰었습니다. 그 시즌 그는 4,029득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으로 아직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체임벌린은 7번의 득점왕과 11번의 리바운드왕을 차지했습니다. 커리어 평균 30.1득점, 22.9리바운드는 역대 최고 수준입니다. 특히 리바운드 평균은 역대 1위이며, 2위인 빌 러셀의 22.5를 근소하게 앞섭니다. 그는 한 경기에서 55개의 리바운드를 잡은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임벌린의 커리어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우승 횟수입니다. 그는 2번만 우승했는데(1967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72년 LA 레이커스), 이는 그의 압도적인 개인 능력에 비해 적은 숫자입니다. 그의 라이벌 빌 러셀이 11번 우승한 것과 비교되며, "개인 vs 팀" 논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체임벌린은 4번의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습니다(1960, 1966, 1967, 1968). 1967년 파이널 MVP도 차지했는데, 당시 그는 세븐티식서스를 68승 13패의 역대급 시즌으로 이끌었고, 플레이오프에서 빌 러셀의 셀틱스를 꺾는 데 성공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체임벌린이 1967-68시즌 리그 어시스트 1위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센터로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며, 그가 단순히 득점만 하는 선수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시즌 그는 경기당 평균 8.6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득점만 하고 패스는 안 한다"는 비판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체임벌린의 운동 능력은 전설적이었습니다. 그는 높이뛰기와 단거리 달리기에서도 뛰어났으며, 대학 시절 육상 선수로도 활약했습니다. 48인치(122cm) 수직 점프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는 그의 시대를 훨씬 앞서간 운동 능력이었습니다.

체임벌린은 14시즌 동안 1,045경기에 출전했으며, 단 한 번도 파울 아웃된 적이 없습니다. 이는 그의 지능적인 플레이와 파울을 피하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의 체력도 놀라웠는데, 커리어 평균 45.8분 출전은 역대 최고 기록입니다.

은퇴 후 체임벌린은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배우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배구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1991년 자서전에서 2만 명의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의 과장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체임벌린은 1999년 10월 63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농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물리적으로 가장 지배적이었던 선수로 기억되며, 그의 기록들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승 횟수 논란에도 불구하고, 윌트 체임벌린은 의심할 여지 없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입니다.

7위: 래리 버드 (Larry Bird)

래리 조 버드는 1980년대 NBA를 매직 존슨과 함께 정의한 전설적인 선수입니다. 인디애나 주의 작은 마을 프렌치 릭에서 자란 버드는 1978년 보스턴 셀틱스에 6순위로 드래프트되었고, 1979년 NBA에 입성했습니다.

버드는 즉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인 시즌 평균 21.3득점, 10.4리바운드, 4.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수상했고, 셀틱스의 승수를 전년도 29승에서 61승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는 NBA 역사상 가장 극적인 개선 중 하나였습니다.

버드는 13시즌 커리어 동안 3번의 NBA 챔피언십을 차지했습니다(1981, 1984, 1986). 1980년대 셀틱스는 레이커스와 함께 리그를 양분했으며, 버드는 팀의 절대적인 리더였습니다. 케빈 맥헤일, 로버트 패리시와 함께 구성한 프론트코트는 역사상 최고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버드는 1984년부터 1986년까지 3년 연속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습니다. 이는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에 이어 세 번째 사례였으며, 이후에도 이를 달성한 선수는 없습니다. 그의 전성기는 짧지만 강렬했습니다.

버드의 슈팅 능력은 전설적이었습니다. 그는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슈터 중 한 명으로, 특히 클러치 상황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3점 슛 대회에서 3연패를 달성했으며(1986-1988), 두 번째와 세 번째 우승 때는 워밍업 재킷을 벗지 않은 채 우승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는 그의 자신감과 실력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버드의 농구 IQ는 역대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게임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고, 상대팀보다 두세 수 앞서 생각했습니다. 그의 패싱 능력도 포워드로서는 이례적으로 뛰어났으며, 노룩 패스와 창의적인 플레이로 동료들을 더 나은 선수로 만들었습니다.

버드는 승부욕이 극도로 강했습니다. 그는 상대팀 선수들에게 "트래시 토크"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경기 중에 어디서 슛을 쏠 것인지 미리 알려주고도 성공시키곤 했습니다. 1986년 플레이오프에서 애틀랜타 호크스를 상대로 60득점을 기록한 경기는 전설적이며, 도미니크 윌킨스와의 듀얼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전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버드와 매직 존슨의 라이벌전은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 관계입니다. 두 선수는 1979년 NCAA 파이널에서 처음 맞붙었고(매직의 미시간 주립대가 버드의 인디애나 주립대를 꺾음), 이후 NBA에서 레이커스와 셀틱스의 라이벌전으로 이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두 선수는 나중에 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1992년 드림팀의 동료로 함께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버드의 커리어는 등 부상으로 단축되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만성적인 등 통증에 시달렸던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후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만약 부상이 없었다면 더 오래 뛸 수 있었을 것이며, 더 많은 기록을 세웠을 것입니다.

버드의 통계는 인상적입니다. 커리어 평균 24.3득점, 10.0리바운드, 6.3어시스트는 그가 얼마나 완전한 선수였는지 보여줍니다. 그는 12번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10번 올NBA 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50-40-90 클럽(야투율 50%, 3점슛 40%, 자유투 90%)을 두 번 달성한 최초의 선수이기도 합니다.

은퇴 후 버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이 되어 1998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페이서스의 단장으로 일하며 2012년에는 올해의 경영자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그가 선수, 감독, 경영자 모두에서 최고상을 받은 유일한 인물임을 의미합니다.

래리 버드는 백인 선수로서 흑인 선수 중심의 리그에서 최고가 된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그는 인종을 초월한 재능과 노력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워크 에식과 경쟁심은 후배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선수들이 그를 롤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8위, 9위, 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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